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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양과 경배


제1과  찬양이란?


찬양하다는 말은 높이다, 기리다, 칭송하다, 감사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1. 무엇을 찬양하는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에는 하나님의 속성(성품)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높이고 기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시 145:3).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찌어다”(시 96:4).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시 57:9-10)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시 89:1-2).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구원사역을 찬양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찌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찌어다”(시 150:1-2).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뉘 능히 여호와의 능하신 사적을 전파하며 그 영예를 다 광포할꼬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사 나로 주의 택하신 자의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서”(시 106:1-5).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눅 1:68-69).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 40:1-3).


    2. 어떻게 찬양할 것인가?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18-20).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무엇보다 먼저 성령 충만을 받아서 찬양해야 한다.

  오늘날 찬양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성령과 찬양의 관곌에 대한 이해가 소홀한 점이 아쉽다. 찬양, 말씀, 기도는 모두 성령이 사용하시는 도구다. 도구가 아무리 정교해도 도구를 들어쓰시는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한낱 인간의 자랑에 불과할 것이다.

성령 충만한 찬양을 드리는 것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전부이자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으로 찬양을 드려야 한다


  입술로 기교로 드리는 찬양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시는 시편, 찬미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찬송, 신령한 노래를 복음성가나 경배송으로 이해한다. 물론 시는 시편이지만 찬미는 그 당시 사람들이 부른 찬송가이고 신령한 노래는 성령의 감동에 의해 즉흥적으로 부르는 방언 찬송이나 신령한 노래를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찬송가나 복음성가, 경배송을 부르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위의 구절은 당시 교인들이 주로 불렀던 노래였을 것이다. 노래의 형태는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찬양의 핵심이 하나님의 속성과 하신 일을 기리는 것이다.



제2장   찬양과 경배 


제3과   활발한 찬양이 주는 유익


  물론 찬양은 말씀을 잘 듣기 위한 마음밭을 갈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찬양의 역할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찬양 자체가 예배이며 성령충만하고 활발한 찬양의 유익이 많다.

활발하게 찬양하는 것은 어린애나 젊은이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른이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이 되어서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어린아이같이 순진하고 겸손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시지 않았는가?(마 18:3).

나의 전통과 경험을 중시하여서 종교적 열정을 경시한다면 돌들이라도 들어서 사용하겠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나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내 나이가 40세, 50세, 60세가 되었다고 어른 행세를 해야 하는가? 다만 체력 문제로 격렬한 찬송을 오랫동안 부리기 힘든 경우는 있다. 그러므로 인도자가 이러한 점들을 잘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활발한 찬양을 드리는 것은 성경의 명령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엄청난 유익이 있다.

내 심령이 치유된다


  감정적으로 손짓하며 큰 목소리로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즐겁게 부르는 찬양은 우리의 상한 심령을 치유해 준다. 시편에는 탄식시의 수가 60개가 넘으면, 다른 형식의 시편에도 탄식시의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험난한 만큼, 오늘을 사는 우리의 신앙 역정도 험난한 것이 아닌가? 요즈음에는 세속의 정신치료에도 음악의 역할이 중시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음악을 통한 치유책을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 특히 고난과 위로의 찬송이나 복음성가가 이러한 역할을 한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를 모으시며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메시는도다 (시 147:1-3).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보다 가깝고 강하게  체험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예배는 부질없는 인간의 행사에 불과하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양 중에 거하는 하나님이시다(시 22:3). 하나님은 찬양 받으시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고(사 42:7, 21), 천국에 가면 성경공부나 말씀선포는 없어도 찬양은 여전히 존재한다(계 4:7-11; 5:9-14; 7:9-12; 11:15-18; 12:10-12; 19:1-8).

뜨겁게 찬양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가깝고 강하게 체험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찬양 중에 하나님의 크신 영광이 임하시기 때문이다(역대하 5:13-14).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부르는 찬양과 그렇지 않은 찬양에는 차이가 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찬양은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가까이 강하게 느끼게 한다.


 찬양만큼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를 잘 표현하는 드물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곧 찬양으로 표현된다. 기쁜 일이 있으면 즐거운 노래가락이 흘러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너희 중에 고통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어다”(야고보서 5:13).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찬양은 가르치고 권면하는 수단이다

억지로 무엇을 암송하는 것보다, 음악의 멜로디를 동반하여 교리나 신조를 교육하는 것은 기독교는 물론 세속에서도 너무나 잘 알려진 방법이다. 그만큼 찬양은 하나님과 신자들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쉽고 외우기 쉽게 잘 표현한다.

성경에서는 찬송을 통하여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라고 말한다(엡 5:19; 골 3:16). 특히 빌 2:6-11; 골 1:15-20; 엡 5:14; 딤전 3:16은 초대교회 당시에 유행하던 찬송가인데 교리적인 가르침이 주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종교지도자들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가르치고 권면하기 위해 자주 노래의 형태를 취한다.


  찬양은 마음밭을 부드럽게 갈아 준다

세상 근심과 염려로 찌들도 온갖 육신적인 생각으로 굳어있던 마음밭이 찬양을 통해 부드럽게 갈아진다. 그 결과 세상 것에서 벗어나 하늘 것을 사모하고 말씀의 씨앗이 싹을 내고 뿌리를 내어 열매 맺는 것을 도와준다.

찬양은 영적 무기이다


  찬양과 ‘용사이신 하나님’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기도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을 하시게 만드는 만큼 우리가 찬양할 때 용사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적--죄와 사단--과 싸우신다. 우리가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자기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너의 가운데 자녀에게 복을 주셨으며 네 경내를 평안케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시 147:12-14).

우리가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는 곤경에 빠진 우리를 긍휼히 보셔서 악의 손에서 건져내 주시고 우리를 위해 대적을 멸하신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나팔을 부는 제사장들을 앞세웠다. 마지막 날에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돌고 온 백성들이 크게 외쳤을 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수 6:20).

모압과 암몬의 대군을 맞이한 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겁에 질려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염려 말라고 하셨다(대하 20장). 이에 유다의 군대들이 성가대를 앞세우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찬양할 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 주셔서 전쟁에 승리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대하 20:22).

   이와 같이 우리가 찬양할 때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신다. 찬양과 하나님의 말씀은 강력한 영적인 무기이다.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이것으로 열방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저희 왕들은 사슬로 저희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시 149: 6-8).

우리가 하나님께 뜨겁게 찬양할 때 상한 심령이 치유 받고 귀신이 쫓겨난다. 다윗이 수금을 켤 때 사울 왕의 악신이 물러갔다.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 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니라”(삼상 16:23; 19:9 참조).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의 고백도 이렇게 되어야 한다.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2-5).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쫓아 찬양할지어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하며 춤추며 찬양하며 높은 소리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









제2장   찬양과 경배

제4과  어떻게 예배를 드릴 것인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시는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제일차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예배, 경배라는 말은 섬긴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은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을 말한다. 영어의 Worship이란 단어도 가치가 있는 것(worth-ship, worthiness)의 뜻을 가진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란 구원사역을 이루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섬기고 헌신하고,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돌릴지어다”(계 5:13).


예배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경배하고 공경하고 찬양하는 행위이다. 죄와 마귀의 세력에서 우리를 건지신 하나님의 업적을 찬양하고, 성령의 인도로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이 곧 예배이다. “그 날(성령이 오시는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데 얼마나 인색인가? 어떤 사람들은 거룩한 하나님께 거룩하고 조용하게 엄숙하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어다”(하박국 2:20).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 멀리 계시기만 하는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임마누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시편 100:2).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시 68:3). 그래서 시편 2장은 이렇게 명령한다.

성경이 말하는 예배는 축제이지 장례식이 아니다. 예배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불꽃 튀는 교제를 나누는 것이지 어떤 행사를 치르는 것이 아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자 사랑이신 하나님, 피조물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시자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11절).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예배드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구원의 벅찬 감격으로 드리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는 성령으로 인도되고 감화되고 능력을 받아서 드리는 예배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 안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드리는 예배만 받으신다. 성령의 감화와 인도하심이 없는 예배는 사람의 행사이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다.


  예배는 또한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 진정 곧 진리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시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성령으로 드려야 할 뿐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드려야 한다. “예수님 안에서” 드리는 예배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마음속에 깊이 모신 사람만이 드릴 수 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이제는 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새겨 두고 나의 모든 것을 예수님만을 위해 바치기로 헌신한 사람이 드린다.

  오늘날 예배를 보는 사람이 많다. 또한 예배를 감독하기 위해 왔다갔다하는 사람이 많다. 남들이 예배보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이다. 마치 자신은 목마르지 않은 것같이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영적인 갈증을 해갈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예배는 보고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갈급하게 사모하는 사람만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 42:1).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시 107:9).


 예배는 성령 충만을 받아서 드려야 한다--나와 하나님 및 이웃과 의 관계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에 복종하라”(에베소서 5:18-21).

세상의 술 취함과 성령 충만 사이에는 외양적인 공통점이 있다. 세상의 술에 취하면 술이 그 사람을 통제하여 속에 있는 온갖 불만과 악독을 쏟아내게 만든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받아서 성령의 통제를 받는 사람은, 마음속에 가득한 은혜와 감사를 하나님께 드린다.

성령 충만과 공중예배, 특히 찬양은 이처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주의 성령으로 충만한 예배는 자유함이 있다. 죄와 마귀로부터의 자유함이 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함이 있다. 인간적인 전통과 교만에서 벗어나는 자유함이 있다. 그러면서도 질서를 지키는 자유함이다.


하나님은 입술, 행위로만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성령 충만한 예배를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난 체험을 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께 비하면 인간의 의는 한낱 누더기에 불과하다(사 64:6)는 사실을 실감한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실감한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에 의해서만 내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나를 낮추고 남을 낫게 여깁니다. 남을 정죄하기 전에 나 자신을 먼저 살피게 된다. 이런 사람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다.


예배는 말씀 충만을 받아서 드려야 합니다--나와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너희가 모든 지혜를 다하여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께 찬양하며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일부 사역).

골 3:15-17은 엡 5:18-20의 평행 구절이다. 에베소서에는 성령 충만하다 예배를 드리라고 명령하지만 골로새서에서는 말씀이 충만하여서 예배를 드리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말씀이자 동시에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곧 신구약 전체인 성경 말씀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조명에 의해 내 가슴을 뜨겁게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풍성하게 거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한 사람만이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나의 영성을 개발함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변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1-3).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서 예배를 드릴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겠다는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복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을 받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

직장의 직원이 사장을 기쁘게 하면 자동적으로 진급이 되고 보너스가 늘어난다. 그런데 일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진급이나 월급 타령만 하는 직원을 좋아할 사장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만 하면 복은 쏟아지게 되어 있다.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소극적으로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세상에 살기는 하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다.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빌 3:20). 적극적으로는 세상에서 성별 되어 하나님께 드려진 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성도이다.

성도는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 말이 이상하지 않는가? 제물을 죽여서 드리는 것이 제사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산 제사”를 드리라고 한다. 여기에 영적인 비밀이 있다. 신자들은 이제 예수 안에서 죄에 대하여서는 죽고,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서는 산 자들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니라”(롬 6:11).

성령 안에서 새사람이 된 신자들이 드리는 예배가 바로 거룩한 산 제사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 이런 예배를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령한 축복을 내려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 삶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예배이며 진정한 예배이며 살아있는 예배이며 축복 받는 예배이다.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사람만이, 죄악으로 가득찬 이 세대를 본 받지 않고 항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


제2장   찬양과 경배 


제5과 활발한 예배에 대한 인식의 변화


 오늘날 부흥하는 교회는 활발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이다. 활발한 예배란 찬양이 살아서 움직이는 예배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성령 충만을 받아서 드리는 예배이다.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예배이다. 활발한 예배는 또한 회중이 참여하는 예배이다. 전통적인 교회는 목회자 중심의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활발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모든 회중이 참여하는 예배를 드린다.


  1. 활발한 예배는 교회 성장의 원동력


  활발하게 드리는 예배를 순복음식 예배라고 하면서 꺼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많은 장로교나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러한 활발한 예배야말로 바로 전통적인 교회가 본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장로교의 박 아론 교수는, 그의 ‘오순절 주의의 인기와 그 위험성’이란 논문에서 오순절 파의 여러 가지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활발한 예배는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오순절주의가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교인들에게 예배학적 참여의 많은 기회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비 오순절계 교회에서는 예배 시에 교인의 참여도가 매우 낮다. 앉아서 찬송이나 부르고 기도는 눈감고 듣고 설교도 앉아서 듣고 교회 광고까지 들으면 예배는 다 끝나고 만다.

그러나 오순절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찬송가를 여러 장 부르고 「아멘」이 계속 터져 나오며 신앙의 간증과 고백을 서로 주고받고 「방언」하며 「신유」를 연출하는 등, 「시끌시끌」한 분위기 가운데 사회자 목사와 교인회중이 혼연일체가 되어 어울려서 예배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교인들이 「제3자」, 「구경꾼」이라는 소외감을 전혀 갖지 않는다.

  정말로 예배의 헤프닝의 주역으로서 교인들은 예배에 「몰두」(?)하며 심취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예배는 어떤 평론가의 말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될 수가 있다. 오늘날 기성교회는--비 오순절계 개신 교회들--은 너무나 주일 예배 시에 교인회중의 예배자로서의 역할이 부족한 것 같다. 몇몇 「성악가」들(?)에게 맡기고 의존하는 실정이니까 말이다.“


 개혁 신학자인 안토니 훼크마(Anthony Hoekema)도 그의 저서인 [방언 연구]에서 박 교수와 비슷한 의견을 제시한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예배와 성도들의 반응에 대하여 지금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자발성과 기회를 주어야 한다. . . . 「불충분하고 무미건조하며 동일한」 교회의 예배도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왜 개인 한 사람[목사를 가르침]이 항상 공적인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 공적인 예배에는 성도들의 많은 반응이 존재하면 안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몇 사람의 잘 훈련된 성가대의 찬송에 대한 오늘날의 강조가 모든 성도들의 영적인 찬송을 강조하는 것을 약화시킨다면 우리는 참으로 예배의 프로그램을 잘 진행시키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후퇴시키는 것인가?”


 

교회 성장학 교수인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는 그의 저서 [성령의 능력과 교회성장]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그는 남미 개신교 신자들의 80% 정도를 점유하는 오순절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의 주요 원인 중의 하나로 활발한 예배를 꼽는다. 와그너 교수에 의하면 “그들은 교회 가는 것이 즐겁다”고 한다.좀 길지만 인용해 보자.

 “여러분이 라틴 아메리카의 오순절 교회 예배에 참석할 때 주목할 첫 번째 것들 중의 하나가 얼마나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순절 예배들에서 찾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큰 하품이다. 불행하게도 하품은 라틴 아메리카에 있는 다른 많은 교회들에 있어서는 모두 너무 자주 일어나는 것이다. 예배는 지루하며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주일에 교회에 한 두번 가는 것조차 싫어한다. . . . 그러나 오순절 신자들은 교회에 가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을 망서리지 않는다.


  기도의 시간에 조차 그들의 소음수준은 높다. . . .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되면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말하고 그 소음은 큰 포효 소리와 같이 들린다. 원기 왕성한 예배자들은 특별히 그들의 목소리 수준을 자제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으며 또 어떤 사람은 그들이 기도하는 동안 최고의 목소리로 소리친다. 이것이 비 영적인가? 아마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수백의 사람들의 예배는 고도의 영적인 예배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예배를 돕는가? 물론이다. . . . 그것(통성기도)은 높은 극적 느낌을 생산하고 감정을 살지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신자들에게 보다 실제적으로 느끼게 한다. . . . 문법상의 실수나 성직자적인 품위의 결여가 옆자리에 있는 사람에 의해 결코 알아차려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예배는 한낱 수동적인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강단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이다. 청중은 '아멘'과 '할렐루야'와 '주를 찬양하라'로 참여한다. . . . 오순절 교회에서 하품을 줄이는 한 가지는 계속 움직여야 한다. . . . 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도 또한 맥박을 고동치게 한다. . . . 이것은 '적당하게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는 바울의 교훈을 위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것은 세밀하게 계획되고 잘 훈련된 오순절 예배 형태이다. 이것은 그들에게는 가장 적절한 예절과 질서의 부분이다. . . .

 내가 처음으로 라틴 아메리카 오순절 운동에 소개되었을 때 본 가장 비현실적인 것 중 하나는 기타, 만돌린 및 아코디언이 기본 악기인 약 500명의 오케스트라였다. 파이프 오르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대의 파이프 오르간이 500명의 악기의 소리와 같은 소리는 결코 낼 수 없으리라.... 많은 라틴 아메리카 인들에게는 파이프 오르간보다 기타나 아코디언이 보다 매력적이다.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더 '성경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보다 중요한 질문은 '어느 소리가 우리 회중에게 더 좋은가?'하는 것이다. 음악에 맞춘 리듬으로 손뼉을 치는 것은 라틴 아메리카 오순절 교회 예배에서는 평범한 일이다. 이것은 개인의 예배참여를 증대시키고 거룩한 소음수준을 몇 데시벨(decibles) 높이며 드라마의 톤을 높인다.“


  2. 한국의 교회들


[이런 교회가 성장한다]에서 뜨겁고 영감 있고 활발한 예배를 교회성장의 주요요인 중의 하나로 제시한다. 몇 교회를 예를 들어보자.

광림교회. “주일대예배를 축제분위기로 이끌어간다. 예배시작도 팡파레의 음악과 함께 시작하여 예배 담당자들이 통로를 통해 입장하는 장면이라든지 찬양대가 오케스트라와 함께 진행되는 것을 보면 예배에 있어서 개신교의 약점인 보는 면을 강조하고있다." 

금란교회. “찬양하는 교회라는 데에 성장의 이유가 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당시 교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교회였다. 그런데 금란교회를 보면 첫째로 찬양대의 기술과 열심이 보통이 아니다. 둘째로 가스펠 성가대원들이 예배시간에도 자유롭게 활동하고 교회의 분위기를 뜨겁게 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통성기도하는 것을 보았는데 방언기도를 비롯해서 온 성도들이 뜨겁게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바로 그 교회의 힘이요 성장요인이 된다.”

사랑의 교회.  성령의 인도하심에 많이 의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른바 기계적이지 않다. 그는 설교하다가도 함께 복음송이나 찬송을 교인들과 함께 부르기도 하고 성경의 요절을 외우게도 한다. 특별히 회개의 기도를 하도록 유도한다.”

영로교회. “수영로 교회의 예배 분위기를 보면 예배를 드릴 적마다 부흥회처럼 뜨겁고 은혜가 넘친다.”

온누리교회. “예배 분위가 '그렇게 좋을 수 없다'는데 성장의 비결이 있다. 주일대예배는 예배 전부터 찬송과 복음송으로 온 교인이 입석 하여 찬양을 드리는데 감사와 기쁨과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분위기가 그대로 예배로 이어지기 때문에 하 목사는 「경배와 찬양」이란 말을 많이 한다.

성도들이 찬양을 드리는 동안 찬양대는 질서정연하게 한 줄로 서서 강대상으로 입장하여 대중 석을 마주본다. 입석한 자세로 묵상기도와 찬송과 기도의 순서가 이어지고 찬양대가 찬양을 드린 다음 찬양대는 조용히 내려가서 찬양대 석에 앉는다. 그리고 담임목사인 하 목사가 설교 전에 기도제목을 주고 통성기도를 하게 한 다음 설교를 시작한다. 그래서 매주가 축제의 분위기요 부흥회의 분위기가 된다. . . .

 (또한) 목요 경배와 찬양에 성장의 비결이 있다. . . . 중요한 것은 뜨거운 분위기가 주일의 예배에서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심장은 뜨거워야 하듯이 예배는 누가 뭐래도 뜨거워야 한다. 예배에서의 뜨거움을 비경건하다고 보는 것은 참 경건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안교회. “주안 교회의 6개 성장 요인 중의 하나는 찬양예배이다. 나 목사의 특별한 점은 성령 운동이다. 장로교에서는 성령 운동하면 순복음 운동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할렐루야, 아멘」이란 말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은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이상한 것이다.”


  회중이 참여하고, 통성기도를 하고, 각종 찬양곡--찬송가 및 복음성가--을 섞어서 부르는 활발한 예배는 오순절파 뿐만 아니라 오늘날 부흥하는 교회들이 적극적으로 취하는 예배 형태이다. 이들 교회의 찬양은 대부분이 키보드나 신세사이즈(Synthesizer)로 온갖 악기의 소리를 내면서 트럼펫이나 기타의 보조로, 최신 「컨템포라리」 곡들을 최소 30분에서 1시간 이상씩 부른다.

찬양 인도자는 빠른 곡과 느린 곡을 잘 섞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연스럽게 맡기며, 회중들은 오버 헤드 프로젝터를 통해 스크린에 비춰진 가사를 보며, 곡에 따라 손뼉을 치거나 한 손 또는 두 손을 자연스럽게 든다.

즐거운 곡이 나올 때는 얼굴과 온 몸이 기쁜 표정을 짓고 슬픈 곡이 나올 때는 눈물을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때때로 전체가 일어서서 박수를 치거나 손을 올리고 심지어는 기뻐서 깡충깡충 뛰는 춤을 추기도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이스라엘의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시 22: 3)과 살아있는 깊은 교제를 나눈다. 이들은 한마디로 찬양을 즐깁니다. “의인은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시 68:3).



 제2장   찬양과 경배 

        찬송가와 복음성가


 아직도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교회 음악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교회의 대 예배에서 복음성가를 불러도 되는 것인가? 복음성가는 부흥회나 전도집회에서 불러야 되는 것이 아닌가? 활발한 예배로의 본격적인 전환을 가로막는 것은 찬송가와 복음성가에 대한 인식 문제이다. 통상적으로 찬송가는 하나님의 영광 및 속성을 찬양하는 것이고 복음성가는 개인의 체험을 강조하는 곡들로 이해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주일예배 때에는 찬송가를 불러야 하고 복음성가는 부흥회나 소그룹 모임 때에나 불러야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구분이 성경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인가?


성경은 찬송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는가? 에베소서 5:18-20과 골로새서 3:16-17에 의할 때 찬양의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 서로를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다(수평적인 관계). 서신서에 기록된 초대 교회의 찬송들, 예를 들어 빌 2:6-11; 골 1:15-20; 딤전 3:16 등의 주요 내용은 교리적인 가르침이다. 둘째,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수직적인 관계).

에베소서 5:18절과 평행구절인 골로새서 3:16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께 찬양하라’라고 명령한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는 구약의 시편은 물론 초대 교회 당시에 신자들이 즐겨 부르던 찬송가 및 성령의 감동에 의해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그러므로 ‘시편을 부르라’고 명령하는 에베소서 5:19절, 골로새서 3:16 및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21장5절에 의할 때, 시편은 구약의 제사제도 때에나 해당되며 신약시대의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세대주의적 주장’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공중예배 시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등 모든 종류의 노래를 부르라고 분명히 명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오늘날 우리들이 부르는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자의적으로 구분하여 찬송은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복음성가는 인간을 향한 노래이므로 공중예배에서는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배란 도대체 무엇인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동시에 은혜를 받는 것이 예배가 아닌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죄인인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전에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하신 일’을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찬양할 때에도 하나님의 속성을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으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에게 구체적인 어떤 행동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찬양한다. 즉,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찬양도 우리와의 구속적인(redemptive)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시편도 이러한 사상을 잘 반영한다. 시편은 그 형태에 따라 가르침과 권면의 지혜시(150개 중 22개), 끝까지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뢰시(14개), 과거에 기사를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는 회상시(3개), 문제를 해결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감사시(22개), 시인의 극한 괴로움과 고통을 호소하는 탄식시(61개) 및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기리는 찬송시(54개)로 구분된다. (*일부 중복됨)

저명한 구약신학자인 클로스 베스터만(Claus Westermann)은 [시편에 있어서의 찬양과 탄식](Praise and Lament in the Psalms)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기리는 찬양과 하나님이 인간에 하신 일을 감사하는 찬양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지혜시, 감사시 심지어는 탄식시조차 구분하지 않고 공중예배나 성전예배에서 두루 사용했다. 탄식시의 범주에 속하는 시편 5, 6, 12 등에 ‘영장을 위한 노래’ 곧 성가대장이 공중 예배시에 사용한 노래들이다. 더군다나 대 예배 때 계시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엄숙하시며 부흥회나 소그룹 모임에 계시는 하나님은 느슨하시고 자유분방하시다는 식의 생각은 지극히 위험한 이원론이다.


둘째, 복음성가의 내용에 가르침이나 권면하는 내용이 많기 때문에 대예배 때에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전혀 성립되지 않는 주장이다.

또한 지나치게 주관적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주장도 우리가 시편을 연구해 보면 얼마나 성경을 넘어서는 잘못된 주장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시편은 주관적인 체험의 극치이며 ‘나’라는 대명사가 수시로 나온다. 다윗이 성가대장인 영장을 위해 지은 노래 중에는 ‘나’라는 대명사를 사용하면서 극도의 개인적인 괴로움과 비탄을 표현한 곡들이 너무나 많다.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시 6: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 잊으시나이까? (시 13:1).


17, 8세기 당시의 기성종교지도자들은 레이번이 극구 칭찬하는 것과는 반대로 아이작 와츠나 찰스 웨슬레의 노래가 술집 노래같이 경박하고 새로워서 변덕스러운 것들이라고 심하게 공격했다. 와츠는 당시 사람들이 구약 성경에 기록된 시편만을 그것도 단조로운 음률로 부르는 것에 반기를 들고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가사와 곡조로 수천여곡을 작곡하여 일반 대중들의 인기를 끌었다.

그랬더니 당시의 기존 종교지도자들은, ‘구약에 기록된 시편만 있으면 되었지 또 다른 노래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한 사람이 수천 곡이나 작곡하여 노래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았느냐?’는 등, 희한한 비난을 퍼부었다. 심지어 그의 찬송은 “와츠의 변덕”(Watts’ Whims)(찬송을 나타내는 hymns와 whims는 발음이 비슷함)이라고 야유하기도 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웨슬레의 찬송에 대해서는 “교회가 규정한 운문적인 시편을 변경시키고, 관계당국이 허락하지 않은 찬송을 소개했다”고 대배심원들이 그를 고소했다.  

   또한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그들의 노래는 찬송가라기보다는 ‘복음성가적 요소’가 더욱 짙다. 제임스 샐리(James Sallee)는「복음주의 찬송가의 역사」(A History of Evangelical Hymnody)에서 아이작 와츠야 말로 “교회 노래의 새로운 형태인 찬송가(Hymn)에 상당한 수준의 주관적 요소 및 복음에 대한 개인적 체험을 가미하였기 때문에 더러는 그를 ‘복음성가의 아버지’(the father of the gospel song)라고 부른다”고 한다.

제임스 샐리에 의하면 챨스 웨슬레는 자신의 곡을 모은 1780년의 ‘모음집’(Collection)에서 우리들이 오늘날 즐겨 부르는 찬송가(Hymn)에 대하여 말하기를, “일반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주제와 멜로디로 표현된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이라고 정의했다고 기록한다.

따라서 우리가 찬송가라고 부르는 아이작 왓츠나 웨슬레의 곡들을 본인들은 물론 전문가들도 찬송가가 아니라 복음성가라고 불렀다.

결론적으로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인위적으로 구분하여 복음성가는 대예배 시에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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